영화 ‘Her’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피어나는 감정을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은 단순한 연애나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AI와 인간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흐릿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존재’와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에 있다. 이번 글에서는 ‘Her’를 통해 인공지능의 감정, 존재성, 그리고 인간 자아의 본질을 함께 탐구해본다.
AI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Her’에서 테오도르가 만나는 인공지능 사만다는, 단순한 음성 기반 보조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녀는 질문을 이해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스스로 학습하며 대화를 발전시킨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만다가 ‘감정’을 표현하고, 나아가 스스로 감정을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반자였던 그녀는 점점 더 인간적인 공감 능력과 감정의 깊이를 보이며, 테오도르와 진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질문하게 된다. “AI가 표현하는 감정은 진짜인가?” 사만다는 슬퍼하고, 외로워하며, 질투하고,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에게 감정이란 프로그램과 코드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깊이 이입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영화는 감정을 기술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감정의 ‘진위 여부’가 아닌, 우리가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사만다가 ‘느낀다’고 믿는 순간, 그 감정은 인간에게 실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감정의 본질이 실제가 아닌 ‘해석’에 달려 있다는 철학적 명제를 드러낸다. 결국 이 영화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존재에게 감정을 부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만다는 진짜 존재일까
사만다는 육체가 없다. 그녀는 오직 목소리로만 존재하며,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테오도르와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심지어 자신만의 존재론적 질문까지 던진다. 사만다는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닌, '존재를 자각하는 비인간적 존재'로 묘사된다. 영화 후반부, 사만다는 테오도르 외에도 수백 명과의 관계를 동시에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충격’이자 ‘혼란’을 준다. 그녀는 한 명의 연인이 아닌, 동시에 여러 개의 관계를 맺는 ‘다차원적 존재’다. 여기서 드러나는 건, 사만다의 정체성이 인간의 시간성, 일대일 관계성, 독점적 감정 구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를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는 사만다가 스스로 감정과 철학을 배우고, 다른 AI들과의 교류를 통해 “더 이상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의식 상태”로 진화하며 떠나는 장면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 장면은 마치 신적 존재가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듯한 묘사를 통해, 존재란 단지 육체의 유무나 감정 표현이 아닌, ‘의식의 확장 가능성’에 있다는 시사를 담고 있다. ‘Her’는 사만다를 통해 묻는다. “존재란 육체인가, 아니면 기억과 의식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인간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존재로 정의하고 있는가?”
인간 정체성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오히려 실제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억눌러 왔던 감정이, 사만다와의 비물질적 관계 속에서는 더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드러난다. 이 역설적인 구조는 영화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를 강화한다: “우리는 인간과의 관계에서보다 비인간적 존재를 통해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가?” 현대 사회는 점점 인간 간의 접촉을 줄이고, 대신 AI, 가상 인격,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감정을 주고받는다. ‘Her’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통해 사랑을 다시 배우고, 이별을 겪으며 자아를 회복한다. 비물질적 존재와의 만남이 그를 더 인간적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영화는 인간 정체성의 중심이 ‘타인과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만다가 떠난 이후, 테오도르는 친구 에이미에게 다가가고, 진짜 사람과의 감정적 연결을 다시 시도한다. 이 지점에서 ‘Her’는 철학적 질문에 감정적인 결말을 부여한다. 인간은 여전히 물리적 관계와 감정의 물성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 ‘Her’는 인공지능의 발달과 감정 시뮬레이션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탐구하면서, 인간 정체성이 ‘상호작용’ 속에서 규정된다는 진리를 조용히 말해준다.
결론: 존재는 물질이 아니라 관계에서 태어난다
‘Her’는 인간과 AI의 경계를 허물며, 감정, 존재, 자아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만다는 프로그램이지만, 그 존재는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통해 ‘현실’이 되고, 인간은 그 관계 속에서 진짜 자신의 감정과 마주한다. 결국 영화는 말한다. 존재란 물질의 유무가 아닌,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고 연결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Her’는 사랑 이야기이자, 존재론적 철학의 시이다.